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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는 홍주 고을에 속했었다. 백제 때는 금주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해풍현에 속했었다. 조선 초엽 때는 홍주군에 속했다가 조선 말엽엔 홍주군 주북면의 지역이었다. 북사리 남관리와 주남면 마구형리(馬口形里), 영암리(靈岩里), 고모리(古毛里) 및 죽전리 · 역티리, 피목동(皮木洞) · 학교리 · 하장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고모와 영암의 이름을 따서 고암리라 해서 홍양면에 편입되었다. 1940년 10월 1일 읍승격에 따라, 홍성읍 고암리가 되었다.
고려 때는 홍주 고을에 속했었다. 백제 때는 금주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해풍현에 속했었다. 조선 때는 초엽에 홍주군에 속했다가 조선 말엽엔 홍주군 송지곡면(松枝谷面)의 지역으로서, 서구리(西龜里), 신동(新洞), 월천리(月天里), 천변리(천변리), 용지리(龍池里), 동구리(東龜里), 사성리(巳城里), 독귀리(獨貴里) 및 금동면(金洞面) 내기리(內基里)와 평면(坪面)내기리(內基里)의 각 일부를 병합, 동구(東龜)와 용지(龍池)의 이름을 따서, 구룡리(龜龍里)라 하여, 홍성군 홍동면에 편입외었다. 그러다가, 1983년 2월 15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홍성읍으로 편입되었다.
고려 때는 홍주 고을에 속했었다. 백제 때는 금주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해풍현에 속했었다. 조선 때는 초엽에 홍주군에 속했다가, 조선 말엽엔 홍주군 주남면(州南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상장리(上長里), 하장리(下長里), 남산리(南山里) 및 역티리의 각 일부와 주북면의 남관리(南官里) 일부를 병합, 남산과 상장 및 하장의 이름을 따서, 남장리라 하여 홍양면에 편입되었다. 1940년 10월 1일 읍승격에 따라, 홍성읍 남장리가 되었다.
고려 때는 홍주 고을에 속했었다. 백제 때는 금주군에 속했ㅇ으며, 신라 때는 해풍현에 속했었다. 조선 초엽에는 홍주군에 속했다가 조선 말엽엔 홍성읍 홍천면(洪天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공암리(孔岩里), 법수리(法首里), 내기리(內基里) 및 봉수리(鳳首里) · 어경리(漁耕里) · 내동(內洞)의 각 일부를 병합, 내법리라 해서 홍성군 홍북읍(洪北面)에 편입되었다. 그러다가, 1983년 2월 15일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홍성읍에 편입되었다.
고려 때는 홍주 고을에 속했었다. 백제 때는 금주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해풍현에 속했었다. 조선 때는 초엽에 홍주군에 속했다가 조선 말엽엔 홍주군 주북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주동(注洞), 종장리(從長里), 가좌동(佳佐洞), 대간동(大干洞) 및 향산리(香山里) ? 북사리(北社里) ? 교동(校洞) 각 일부를 병합하여 대간동(大干洞)과 교동(校洞)의 이름을 따서, 대교리라 하여 홍양면에 편입되었다. 1940년 10월 1일 읍승격에 따라, 홍성읍 대교동이 되었다.
고려 때는 홍주 고을에 속했었다. 백제 때는 금주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해풍현에 속했었다. 조선 때는 초엽에 홍주군에 속했다가 조선 말엽엔 홍주군 주북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갈마동(渴馬洞), 소동(昭洞), 월계리, 북촌리(北村里), 교동 및 향산리의 각 일부를 병합, 소동과 향산의 이름을 따서, 소향리라 하여 홍양면에 편입되었다. 1940년 10월 1일 읍승격에 따라, 홍성읍 소향리가 되었다.
고려 때는 홍주 고을에 속했었다. 백제 때는 금주군(今州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초엽에 홍주군에 속했다. 조선 때는 초엽에 홍주군(洪州郡)에 속했다가 조선 말엽엔 홍주군 주남면(洪州郡 州南面)의 지역이었다. 1914행정구역 개편 때, 송암리(松岩里) · 죽전리(竹田里 ) · 사성리 · 월천리 · 학교리(鶴嬌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