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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때는 사시량현(沙尸良縣)에 속했었다. 신라 때는 결성군(潔城郡)의 영현(領縣)인 신량현(新良縣)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초엽에 여양현(驪陽縣)에 속했었다. 그 뒤엔 홍주에 속했다가 조선 초엽엔 홍주군(洪州郡)에 속했으며 조선 말엽엔 홍주군(洪州郡) 오사면(烏史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옥계리(玉溪里) 화전 죽하리(竹下里) 성중리(城中里) 성하리(城下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화전과 옥계(玉溪)의 이름을 따서 화계리(花溪里)라 하고 홍성군(洪城郡) 장곡면(長谷面)에 편입되었다.
백제 때는 사시량현(沙尸良縣)에 속했었다. 신라 때는 결성군(潔城郡)의 영현(領縣)인 신량현(新良縣)에 속했으며 고려 초엽엔 여양현(驪陽縣)에 속했다가 뒤에 홍주에 속했었다. 조선조 초엽엔 홍주군(洪州郡)에 속했다가 조선 말엽엔 홍주군(洪州郡) 화성면(化城面)의 지역이었다. 산수가 으뜸이어서 옥계(玉溪)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옥계리(玉溪里)와 원당리(元堂里) 일부와 유곡면(酉谷面)의 대부리(大釜里) 그리고 성지면(城枝面)의 상두리(上杜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옥계리(玉溪里)라 하고 홍성군(洪城郡) 장곡면(長谷面)에 편입되었다.
신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한 대현리(大峴里) 지역은 삼한시대에 마한의 부락사회국가인 사로국의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백제 때는 사시량현(沙尸良縣)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결성현(潔城縣)의 영현(領縣)이 신량현(新良縣)에 속했었다. 고려 때는 초엽에 여양현(驪陽縣)에 속했다가 뒤에 홍주에 속했으며 조선 초엽엔 홍주군(洪州郡)에 속했었다. 조선 말엽 홍주군(洪州郡) 유곡면(酉谷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월현리(月峴里) 평촌(坪村) 대부리(大釜里) 일부를 병합하여 대부(大釜)와 월현(月峴)의 이름을 따서 대현리(大峴里)라 하여 홍성군(洪城郡) 장곡면(長谷面)에 편입되었다.
백제 때는 사시량현(沙尸良縣)에 속했었다. 신라 때는 결성군(潔城郡)의 영현(領縣)인 신량현(新良縣)에 속했며 고려 때는 초엽에 여양현(驪陽縣)에 속했으며 그 뒤에 홍주에 속했었다. 조선 때는 초엽에 홍주군에 속했다가 조선 말엽엔 홍주군 유곡면(洪州郡 酉谷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하소리(下所里) 행계리(杏溪里) 지정리(智亭里) 일부를 병합하여 행계(杏溪)와 지정(智亭)의 이름을 따서 행정리(杏亭里)라 하여 홍성군(洪城郡) 장곡면(長谷面)에 편입되었다.
신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삼한 때 마한의 사로국의 외과에 자리해서 일찍부터 인류가 살기 시작한 곳이다. 백제 때는 사시량현(沙尸良縣)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결성군(潔城郡)의 영현(領縣)인 신량현(新良縣)에 속했었다. 고려 초엽에 여양현(驪陽縣)에 속했다가 뒤에 홍주에 속했었다. 조선 초엽엔 개편에 따라 홍주군(洪州郡)에 속했다가 조선 말엽엔 홍주군(洪州郡) 유곡면(酉谷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의 개편의 따라 얼방면 상식리(上植里) 강촌(江村)의 각 일부와 청양군(靑陽郡) 서상면(西上面)의 하강리(下江里)일부와 대흥군(大興郡) 일남면(一南面)의화암리(花岩里) 각 일부를 병합하여 천태리(天台里)라 하고 홍성군(洪城郡) 장곡면(長谷面)에 편입되었다.
백제 때는 사시량현(沙尸良縣)에 속했었다. 신라 때는 결성군(潔城郡)의 영현(領縣)인 신량현(新良縣)에 속했으며 고려 초엽엔 여양현(驪陽縣)에 속했었다. 그 뒤 홍주군(洪州郡)에 속했다가 조선 초엽엔 홍주군(洪州郡)에 속했으며 조선 말엽엔 홍주군(洪州郡) 유곡면(酉谷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지명동(智明洞) 상흑리(上黑里) 하흑리(下黑里) 상계리(上桂里) 하계리(下桂里) 계산리(桂山里) 마정리(馬井里) 마전리(麻田里) 각 일부와 홍안송면(洪安松面) 상소리(上所里) 각 일부를 병합하여 지명(智明)과 마정(馬井)의 이름을 따서 지정리(智井里)라 하여 홍성군(洪城郡) 장곡면(長谷面)에 편입되었다.
백제 때는 사시량현(沙尸良縣)에 속했었다. 신라 때는 결성군(潔城郡)의 영현(領縣)인 신량현(新良縣)에 속했으며 고려 초엽엔 여양현(驪陽縣)에 속했었다. 그뒤 홍주에 속했다가 조선 초엽엔 홍주군(洪州郡)에 속했으며 조선 말엽엔 홍주군(洪州郡) 오사면(烏史面)의 지역으로서 대밭이 많았다 하여 대밭 또는 죽전(竹田)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죽중리(竹中里) 죽상리(竹上里) 죽하리(竹下里) 가중리(佳中里) 옥계리(沃溪里) 오동리(烏東里) 일부를 병합하여 죽전리(竹田里)라 해서 홍성군(洪城郡) 장곡면(長谷面)에 편입되었다.
백제 때는 사시량현(沙尸良縣)에 속했었다. 신라 때는 결성군(潔城郡)의 영현(領縣)인 신량현(新良縣)에 속했으며 고려 초엽엔 여양현(驪陽縣)에 속했다가 뒤에 홍주에 속했었다. 조선 초엽엔 홍주군(洪州郡)에 속했다가 조선 말엽엔 홍주군(洪州郡) 유곡면(酉谷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명동(明洞) 시목리 명천동(鳴川洞) 월촌(月村) 내동(內洞) 화양리(花陽里) 마전리(麻田里)용연리(龍淵里) 각 일부를 병합하여 월촌(月村)과 명천(鳴川)의 뜻을 따서 월계리(月溪里)라 하고 홍성군(洪城郡) 장곡면(長谷面)에 편입되었다.
백제 때는 사시현(沙尸縣)에 속한 산골이었다. 신라 때는 결성군(潔城郡)의 영현(領縣)에 속했으며 고려초엽엔 여양현(驪陽縣)에 속했다가 뒤에 홍주에 속하였으며 조선 초엽엔 홍주군(洪州郡)에 속했었다. 조선 말엽엔 홍주군(洪州郡) 오사면(烏史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성상리(城上里) 중촌(中村) 진방리(眞方里) 성중리(城中里) 성하리(城下里) 광제리(廣濟里) 죽하리(竹下里) 각 일부를 병합하여 광제(廣濟)와 성중리(城中里)의 이름을 따서 광성리(廣城里)라 하여 홍성군(洪城郡) 장곡면(長谷面)에 편입되었다.
백제 때는 사시량현(沙尸良縣)에 속했었다. 신라 때는 결성군(潔城郡)의 영현(領縣)인 신량현(新良縣)에 속으며 고려 초엽엔 여양현(驪陽縣)에 속했다가 뒤에 홍주에 속했었다. 조선 초엽엔 홍주군에 속했다가 조선 말엽엔 홍주군(洪州郡) 성지면(城枝面)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상오리(上梧里) 반송리(盤松里) 중두리(中杜里) 하두리(下杜里)와 상두리(上杜里) 분토동(分土洞)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오(上梧)와 반송(盤松)의 이름을 따서 상송리(上松里)라 하여 홍성군(洪城郡) 장곡면(長谷面)에 편입되었다.
신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한 곳으로 삼한 시대에 마한의 부락사회국가인 사로국이 있었던 곳이다. 백제 때에는 사시량현(沙尸良縣)에 속했으며 신라 때에는 결성군(潔城郡)의 영현(領縣)인 신량현(新良縣)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여양현(驪陽縣)에 속했다가 뒤에 홍주에 속했다. 조선 초엽에 홍주군(洪州郡)에 속했으며 조선 말엽엔 홍주군(洪州郡) 얼방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상냉리(上冷里) 하냉리(下冷里) 학성리(鶴城里)와 화성면(化城面)의 옥계리(玉溪里) 일부와 유곡면(酉谷面)의 은동(隱洞) 수문리(水門里) 일부를 병합하여 산성(山城)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산성리(山城里)라고 하고 홍성군(洪城郡) 장곡면(長谷面)에 편입되었다.
백제 때는 사시량현(沙尸良縣)에 속했었다. 신라 때는 결성군(潔城郡)의 영현(領縣)인 신량현(新良縣)에 속했으며 고려 초엽엔 여양현(驪陽縣)에 속했다가 뒤에 홍주에 속했었다. 조선 초엽엔 홍주군(洪州郡)에 속했다가 조선 말엽엔 홍주군(洪州郡) 성지면(城枝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동리(東里) 신곤리(新昆里) 녹문리(鹿門里) 성중리(城中里) 아동(牙洞)의 일부를 병합하여 신곤(新昆)과 동리(東里)의 이름을 따서 신동리(新東里)라 하여 홍성군(洪城郡) 장곡면(長谷面)에 편입되었다.
백제 때는 사시량현(沙尸良縣)에 속했었다. 신라 때는 결성군(潔城郡)의 영현(領縣)인 신량현(新良縣)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초엽에 여양현(驪陽縣)에 속했다가 뒤에 홍주에 속했었다. 조선 때는 초엽에 홍주군(洪州郡)에 속했다가 조선 말엽엔 홍주군(洪州郡) 오사면(烏史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오서리(烏西里)와 오동리(烏東里) 죽하리(竹下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뒤의 오성산(烏城山)의 이름을 따서 오성리(五聖里)라 하여 홍성군(洪城郡) 장곡면(長谷面)에 편입되었다.
백제 때는 사시량현(沙尸良縣)에 속했었다. 신라 때는 결성군(潔城郡)의 영현(領縣)인 신량현(新良縣)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초엽에 여양현(驪陽縣)에 속했다가 뒤에 홍주에 속했었다. 조선 초엽엔 홍주군(洪州郡)에 속했다가 조선 말엽엔 홍주군(洪州郡) 성지면(城枝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신리(新里) 중방리(中方里) 상풍리(上豊里) 하풍리(下豊里) 정동(井洞)과 분토동(分土洞) 산양리(山陽里)의 각 일부와 오산면(烏山面)의 광제리(光濟里) 일부를 병합하여 신리와 상풍(上豊)의 이름을 따서 신풍리(新豊里)라 이라고 부른다.
백제 때는 사시량현(沙尸良縣)에 속한 산골이었다. 신라 때는 결성군(潔城郡)의 영현(領縣)인 신량현(新良縣)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여양현(驪陽縣)에 속했다가 뒤에 홍주에 속했으며 조선 때는 초엽에 홍주군(洪州郡)에 속했다가. 조선 말엽엔 홍주군(洪州郡) 오사면(烏史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송암리(松岩里) 가동리(佳東里) 가중리(佳中里) 죽상리(竹上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가동(街洞)과 송암(松岩)의 이름을 따서 가송리(佳松里)라 하여 홍성군(洪城郡) 장곡면(長谷面)에 편입되었다.
백제 때는 사시량현(沙尸良縣)에 속했었다. 신라 때는 결성현(潔城縣)의 영현(領縣)인 신량현(新良縣)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초엽에 여양현(驪陽縣)에 속했다가 뒤에 홍주에 속했었다. 조선 때는 초엽엔 홍주군(洪州郡)에 속했었다가 조선 말엽엔 홍주군(洪州郡) 성지면(城枝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하오리(下梧里) 대교리(大橋里) 도현리(道峴里) 분토동(墳土洞) 산양리(山陽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도현(道峴)과 산양(山陽)의 이름을 따서 도산리(道山里)라하고 홍성군(洪城郡) 장곡면(長谷面)에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