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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조선의 미래인 현대의 우리는 과거의 정취를 찾아 떠나고 있다. 전주한옥마을은 주말이면 발 디딜 틈 없을 정도가 되었고 경주나 서울의 경복궁, 북촌도 넘치는 인기로 북적거린다. 옛날의 생활이 그리워서 그런 것은 아니다. 90% 이상이 상민이나 천민이었는데 누가 얼마나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겠나.
시끌벅적 복잡하고 삭막한 도심의 빌딩 숲에서 숨이 막힌 도시인들은 탁 트인 공간에 마음이 편해지는 흙과 나무, 한지로 이루어진 장소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홍성에는 조선 시대 양반처럼 느긋하게 느린 걸음으로 한가하고 담백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홍주성이 있다.
홍주성은 고지도에서 보면 세 개의 문루가 있었다고 한다. 몇 년 전 발견한 남문의 존재로 하나의 문루가 더 있었다고 하지만 언제 네 개였다가 세 개가 됐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북문과 서문이 철거되고 동문인 조양문은 홀로 남게 되었다. 물론 일본인들이 조양문을 좋아서 내버려 둔 게 아니다. 당시 홍주 주민들이 조양문의 철거를 강하게 반대하여 버티게 된 것이다.
을사늑약 체결 후 의병들과 일본군의 전투 흔적이 벽에 남아 있기도 하다. 상처는 아물지 못했지만 굳은 마음으로 지켜진 조양문은 홍성의 상징이 되었다. 중심가에 위치하여 많은 차가 지나다니는 모습에서 보자마자 서울 숭례문이 떠오른다.
밤이 되면 조명이 밝혀지며 또 다른 모습을 연출하기도 한다. 홍성의 인기축제인 홍성역사인물축제를 할 때 홍성을 대표하는 역사인물들로 분장하여 말을 타고 조양문을 지나기도 했는데 그 장면이 꽤 멋졌던 터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조양문을 지나 안회당과 함께 홍주의 관아였던 홍주아문으로 가보자. 지금 이곳은 홍성군청으로 공무원들이 출퇴근하는 장소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 자리는 공무를 보던 자리였다니 왠지 재미있다.
군청 앞에는 600년이 넘은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다. 그것도 두 그루의 나무가 한 쌍으로 서로 얽혀있다. 나무의 높이는 17m, 둘레는 6m 정도로 그 둘이 함께 있으니 더욱 커다랗게 느껴진다.
이 나무는 마을에 액운이 낄 때마다 울어 목사가 마을이 화를 당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수호수이다. 그래서 홍주에 부임하는 목사들은 가장 먼저 이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지냈고, 지금도 홍성에서 큰 행사를 할 적에는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홍주아문 뒤뜰로 자리를 옮겨보자. 군청과 연결된 바로 이곳이 안회당이다. 사적 제213호인 안회당은 홍주목사가 집무를 보던 곳이다. 1678년에 처음 지어졌고, 1870년에 다시 크게 지어져 그때부터 안회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안회당은 노인을 평안하게 모시고 벗을 믿음으로 하여 아랫사람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뜻을 가진 관아로 흥선대원군이 지어준 이름이다. 보통 문화재로 지정된 곳은 외부에서만 바라볼 뿐 들어갈 수 없는데, 홍성의 안회당은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다. 이름마저 편안한 안회당에서 우리는 차를 마실 수 있다. 신을 벗어두고, 삐걱대는 마루를 조심스레 걸어 문을 열어보니 내부의 크기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홍성군의 문화재 활용 사업으로 시작된 안회당 전통찻집에서 어디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정갈함을 느낄 수 있다. 아름다운 한옥의 고요한 분위기 속에 여하정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산뜻하게 우려진 따뜻한 연잎 차를 한 모금 마시면 목줄기를 타고 가슴까지 데워진다.
쓸쓸한 가을바람에 서늘해진 마음과 긴장된 근육이 살며시 풀린다. 또한, 이곳에서는 신청을 통해 핸드드립 커피를 체험할 수도 있고, 어린이 다도 예절교실, 한국사 등 다양한 인문학 강좌가 열린다. 안회당에서 배우는 한국사라니 어느 도서관보다도 공부가 잘될 것 같다.
향긋한 연잎 차 한 잔의 여유를 부리고, 느긋한 걸음으로 성 안을 걷는다. 나도 모르게 걸음 속도가 느려진다. 이렇게 천천히 걸어 본 것이 얼마 만일까. 지하철이나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혹은 퇴근 후 집으로 일 분 일 초라도 빨리 가서 쉬고 싶어서 뛸 듯 걷곤 했는데. 다들 이렇게 움직여서 당연히 따라 하게 되었는데 그게 스스로 마음에 들진 않았나 보다. 천천히 걸으며 살며시 부는 바람을 느끼니 숨이 트인다.
작은 연못에 지어진 한 정자가 아담하고 부드러운 모습으로 지나가는 이들에게 들어왔다 가라 손짓한다. 물론 나도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이곳은 안회당에서 차를 마시며 바라보았던 여하정이다. 옛 홍주목사들이 일을 하다가 쉬던 곳이라고 한다. ‘여하‘란 ‘나는 백성을 위해 무엇을 할까‘라는 뜻이니 홍주 목사들은 쉴 때도 업무 생각을 떨쳐선 안 됐나 보다. 이제는 홍성을 찾은 관광객과 이곳 주민들의 쉼터가 되었다.
여하정에 편안히 앉아 연못에 반영되는 나무와 한가로이 산책하는 가족들을 바라보자니 아주 잠시 온갖 시름 잊게 된다.
여기에는 200년 된 커다란 왕버들 나무가 근사한 모습으로 여하정을 지키고 있다.
홍주아문의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함께 오랜 시간 홍주의 희로애락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이 나무에서 인생을 달관한 듯한 평온함이 느껴진다.
이곳을 벗어나 다시 현대의 도심으로 돌아가면 다시 찾아올 시름들이지만 이 찰나의 편안함이 내게 힘을 준다.
빌딩 숲이 답답하고 한가로이 마음을 달래고 싶다면 이곳에서 쉬었다 가자. 험난한 역사를 보낸 홍주성이 당신을 위로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