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메뉴 바로가기

美來路홍성군 문화관광

해당 콘텐츠와 관련된 유튜브 영상을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하단에 콘텐츠는 유튜브에 등록된 관련 영상을 불러와서 제공하고 있습니다.
부적절한 영상은 필터링을 통해 지속적으로 선별 합니다. 문제있는 영상은 신고해주세요!

신고하기

홍주성길

홍주성 천년여행길은 지금까지 천년을 한결같이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의 중심을 지켜오며 그 찬란한 천년 역사를 품에 안고 있는 내포의 큰 고을 홍주를 돌아보는 길 입니다.

홍주성 천년여행길은 희망찬 홍성을 상징하는 고암길
서민경제의 심장과 같은 장터길,
도심속 답답한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힐링 공간인 매봉재길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홍주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한 홍주성길,
근·현대를 넘어드는 추억의 골목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단 지도의 마커를 클릭하면 해당 코스의 상세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코스 01복문지,서문지

복문지,서문지 사진

홍주성을 지키던 홍주성 문

홍주성의 생활모습을 그려놓은 골목길을 벗어나면 보이는 큰길 중앙이 북문지입니다. 북문지는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철거된 이후 최근 복원작업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서문지 또한 1913년 일본에 의해 철거되었습니다. 1870년(고종 7)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할 때 흥선대원군이 서문(경의문)과 북문(망화문)의 현판 글씨를 직접 써서 내려주었으나 지금은 모두 전해지지 않습니다.

코스 02‘대흥’자 성벽과 수구

‘대흥’자 성벽과 수구 사진

홍주성벽을 책임져라

홍주성 서쪽성벽을 따라 돌다보면 최영장군 흉상 뒤쪽에 ‘대흥(大興)’이라고 제법 선명하게 새겨진 돌을 볼 수 있습니다. 대흥은 현재 예산군 대흥면을 가리키며, 이 돌부터 다음에 표시된 돌까지 대흥 사람들이 쌓았다는 표시입니다. 월계천의 흐름이 홍주성의 서쪽 성벽에서 급격히 꺾이며 성벽에 피해를 주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1870년 홍주 목사 한응필이 수구와 수로를 만들어 물이 홍주성 안으로 흐르도록 했습니다. 현재는 수구의 일부 흔적만 남아있습니다.

코스 03최영과 성삼문

최영과 성삼문 사진

홍주성벽을 책임져라

홍주성 서쪽성벽을 따라 돌다보면 최영장군 흉상 뒤쪽에 ‘대흥(大興)’이라고 제법 선명하게 새겨진 돌을 볼 수 있습니다. 대흥은 현재 예산군 대흥면을 가리키며, 이 돌부터 다음에 표시된 돌까지 대흥 사람들이 쌓았다는 표시입니다. 월계천의 흐름이 홍주성의 서쪽 성벽에서 급격히 꺾이며 성벽에 피해를 주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1870년 홍주 목사 한응필이 수구와 수로를 만들어 물이 홍주성 안으로 흐르도록 했습니다. 현재는 수구의 일부 흔적만 남아있습니다.

코스 04한용운과 김좌진

한용운과 김좌진 사진

홍성의 자랑스러운 인물

한용운(1879~1944)은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입니다. 1926년 88편으로 된 ‘님의 침묵’ 시집을 발간하였고, 한국불교의 개혁방안을 제시한 ‘조선불교유신론’을 썼습니다. 김좌진(1889~1930)은 갈산면 행산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907년 호명학교를 세웠으며, 1917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습니다. 1920년 10월 만주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코스 05손곡 이달과 시비

손곡 이달과 시비 사진

허균의 스승, 방랑시인 손곡

이달(1539~1612)은 구항면 황곡리에서 본부인이 아닌 첩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서자는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벼슬길에 오르길 포기하였습니다. 그는 서자라고 놀림 받자 홍주를 떠나 방랑생활을 하다가 강원도 원주 손곡(蓀谷)에 묻혀 살았습니다. 이달은 당시 당나라 시풍의 시를 잘 쓰는 삼당시인(三唐詩人) 중의 한명으로 불렸습니다. 대표적은 제자로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가 있습니다.

코스 06홍화문

홍화문 사진

홍성의 발전을 기원하며

홍화문은 홍주성의 남문입니다. 1870년 고지도에는 ‘남문이읍기방해폐(南門以邑基妨害廢)’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 후 남문 주변에 송림을 만들어 풍수지리상 나쁜 기운을 막으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발굴을 통해 과거 남문의 형태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있는 성문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홍성군은 2013년 12월 남문을 복원한 후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홍성의 앞날을 상징하는 ‘홍화문’으로 문의 이름을 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