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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김좌진장군은 1889년(고종26) 선원 김상용의 12세손인 형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호방영민하고 용력이 뛰어났고, 18세 때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인재양성과 신학문을 교육하기도 하였습니다. 광복단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겪은 후 1917년 만주로 건너가 3·1운동의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의 민족지도자와 함께 서명하였습니다.
1919년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31세가 되던 해에 시베리아로 출전 중이던 일본군 3,000여 명을 화룡현 청산리로 유인하여 1,200여 명을 전사상자로 만든 6일 간의 전투가 바로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금자탑을 이룬 1920년 10월 21일에 있었던 청산리 전투입니다.
1925년 김혁, 최호, 나중소 등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여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1929년 김종진, 이을규 등과 함께 한국총연합회를 조직하여 수석에 취임하여 재미동포의 교육과 민생에 주력하는 한편, 중국의 항일 세력과 연합하여 대일항전을 준비하던 중 1930년 1월 24일(음 12월 25일) 북만주 중동선 산시역부근 정미소 앞에서 일제의 사주를 받은 박상실의 흉탄에 순절하였습니다.
홍성군은 1991년부터 김좌진장군 생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생가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고 관리사 및 전시관을 건립했습니다. 또한 김좌진장군 사당은 1998~2001년까지 성역화사업 추진으로 2,880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내·외삼문, 재실, 주차장 등을 조성하였으며, 매년 10월에 김좌진장군의 청산리전투 전승기념축제를 개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