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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나는 달력을 한 장 넘길 때마다 오일장이 서는 날을 미리 동그라미 쳐놓으며 기다렸다. 장날은 가장 신나는 날이었다. 그 날만 먹을 수 있는 것이 있었고 구경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북적북적 모였다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볼 때마다 신기했다.
1943년 첫 장을 시작으로 홍성오일장은 모이고 사라지길 어느새 70여 년. 횟수로 치면 오천 번이 훌쩍 뛰어넘는다. 세상이 달라진 만큼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소박한 추억 내음이 복작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번져 나온다.
홍성전통시장에는 시장이 가장 흥했던 시절이 벽에 남아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팔도를 돌며 각종 물건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함께 팔던 보부상의 함박웃음, 기다리고 기다리던 장날에 모인 아이들이 신나 재잘거리는 소리, 소 울음소리 등 음성이 지원되는 듯하다.
들에서 산에서 바다에서 오랜만에 서로의 소식들을 전하느라, 물건을 전하느라 와글와글 시끄럽지만 정답고 그리운 소리가 벽에서 새어 나온다.
북적거리는 시장에 들어서기 전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바로 은행가기. 평소에는 돈을 만질 일이 거의 없다. 카드 한 장이면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고 식당이나 마트에서 원하는 음식과 물건을 살 수 있다.
현금이 없어도 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다. 하지만 시장의 묘미 중 하나는 역시 주고받는 현금 아닐까. 아, 오래간만에 맡아보는 돈 냄새. 오랜만에 만져보는 지폐의 낯선 질감이 오돌오돌 신선하고 재밌다.
한 번의 카드 긁기로 뚝딱 끝나는 것이 아니라 품목마다 만나는 사람이 다르고 매번 천 원, 삼천 원 계산하며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재미있다.
원하는 물건들을 살 때마다 뿌듯하다. 편리함 대신 재미가 있고 줄어드는 돈을 계속 확인하는 스릴도 있다.
상추 천 원어치 사는데도 비닐봉지가 터지도록 담아주는 상인 아주머니의 인심도, 국물이 끝내주고 고기도 많은데 너무 싼 값에 놀라게 되는 국밥도, 시장 최고의 길거리 음식으로 유명한 어묵집이 문은 닫지 않았을까 조마조마하며 잰 발로 서두르는 이 마음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깡! 깡! 깡! 불꽃이 피어오르다 금세 사라진다. 충청남도 무형문화재인 모무회 대장장이 무쇠를 두드리고 있다.
홍성의 마지막 대장장으로 유명한 모무회 대장장은 옛방식 그대로 작업을 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시작한 오랜 일이지만 잠시도 한눈팔 수 없다.
이마와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땀이 불을 매만진다. 작업의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놓쳐선 안 된다. 언제 사고가 일어날지 모르고 작품의 완성도가 낮아질지 모른다.
그의 노력만큼 대장장의 물건은 그 진가로 여전히 인정받고 있다. 홍성전통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물건은 사지 않더라도 모무회 대장장의 작업은 구경하고 간다고 할 만큼 그는 시장의 오랜 역사이자 인기인이다.
시장 중앙 길가를 걷다 보면 놀이터에 특이한 석상이 하나 보인다. 오묘하고 귀엽게 생겼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분명 바로 이 ‘대교리 석불입상’일 것이다.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은 어린 시절 피카소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와 비슷했다. 뭔지 잘 모르겠지만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이 단순하고 재미있었다.
이 성격 좋아 보이는 석상은 조선 시대의 석조 미륵보살입상으로 오랜 시간 홍성 주민들을 수호해 오고 있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전통시장에 화재가 자주 일어나자 주민들은 미륵불에 제사를 지냈고 그 뒤로 불이 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장날마다 비가 내려 속상하던 상인들이 모여 미륵불에 기도를 드렸더니 비가 내리는 횟수가 급격히 줄었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옛날 홍성은 이솝우화에 나오는 해와 바람처럼 불과 물이 서로 강하다고 싸우며 힘자랑을 하던 그런 곳이었나 보다.
말썽을 해결해준 미륵불에게 홍성 주민들은 고민이 있을 때마다 소원을 빌게 되었다. 소원목을 올렸다고 해서 미륵불이 시험에 합격시키고 아이를 갖게 하였던 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마음을 편하게 해주어 기다림의 인내를 가능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적어도 플라시보 효과는 있기에 이 석불입상의 인기는 여전하다.
한 사람 한 사람 모이고 모여 이루어진 전통시장에는 그렇게 모이고 흩어졌던 사람과 세월만큼 이야기도 많다. 지금 모인 시장 사람들의 맛과 이야기, 돈을 건네받던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 후에 홍성전통시장의 벽화로 남겨질지도 모르겠다.